셰익스피어의 한국 공연 1996. 9 ∼ 1997. 12
신정옥 (명지대)
김동욱 (성균관대)
이지태 (명지대)
[햄릿] (이윤택 연출 / 문예회관 대극장 / 96년 9월)
우리시대의 문화 게릴라이기를 바라는 연출가 이윤택이 지난 6월 동숭 아트센타에서 올렸던 햄릿을 대폭 손질하여 '96 서울연극제의 공식 참가작으로 문예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렸다. 2시간 30여분이던 이전 공연보다 1시간 가량 축약하여 훨씬 선명하게 부각된 자신의 햄릿 해석을 선보인다. 이윤택적 햄릿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겐 다소 실망일 수도 있겠으나, 초연때보다 한결 차분하게 정돈된 연출로 셰익스피어 원작의 풍부한 시상과 주옥같은 대사 등이 크게 훼손되지 않은 채 전달되어 고전의 향기를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햄릿이 '거대한 감옥'이라고 불렀던 덴마크의 엘시노어 성은, 천마총의 내부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던 초연때의 구조를 약간 수정했다. 겹겹이 싸인 두꺼운 철판으로 무대공간을 입체적인 액자처럼 에워싸게 만들어서 위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무대장치로 유령 장면이나 장례 장면등에 신비감을 더하는 효과를 낳기에 충분했다. 극중극의 배우들이 등장할 때 연주하는 악기와 소리도 전통악기을 주로 사용하되 바이올린 같은 서양 현악기의 소리를 가미하여 그 질감의 배타성을 다소 누그러뜨린다는가, 궁중의 결혼축하 연회복은 서양식 댄스파티의 복장이고, 극단 배우들의 연기동작과 표현은 우리의 전통 춤이다. 극중극의 대사는 군데군데 영어로 처리되기도 하였다. 타이틀 롤은 맡은 김경익은 이윤택의 우리극 연구소 제 1기생으로 깨끗하고 신선한 연기로 관객들의 주목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호레이쇼역의 정동숙과 극중왕역의 하용부, 그리고 극중왕비역의 배미향등의 노련미는 서로의 조화속에서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어 무대에 무게와 힘을 배가했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개최되는 제 12회 아시테지 대륙연극제의 공식 초청작으로 선정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햄릿공연으로 서양인들에게 보여지게 된다. 굿판과 장고, 괭가리, 북등으로 윤색된 이윤택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들릴만큼 잘 정제된 이 햄릿은 종래의 민속적인 요소에 지나치게 의존하기를 탈피하고, 세계 공유의 보편성을 가미한 한편의 고전작품으로 만들어 우리 공연의 현주소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연출가의 바램에 성원을 보낸다.
[떠벌이 우리 아버지 암에 걸리셨네](1996. 11. 22∼12. 31) / 윤영선 작 / 채승준 연출 / 극단 연우무대 / 연우소극장
96년도에 주류를 이루었던 셰익스피어 원작의 [햄릿]을 패러디 한 일련의 작품 중의 하나가 채승훈이 연출을 맡은 극단 연우무대의 [떠벌이 우리 아버지 암에 걸리셨네]다. 11월 22일부터 시작되어 96년의 대미를 장식한 이 작품은 비극적 세기관이 깔린 희극적 묵시록이다. 현대화된 햄릿, 주인공 '나'는 외국 유학에서 돌아오면서 폐암에 걸린 아버지에게 말보로 담배 한 보루를 선물로 내민다.
'나'도 그리고 폐암에 걸린 아버지도 자신들이 처한 환경을 극복하려는 의지도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썩어 가는 이 사회를 인간의 힘으로 개선시키는 것은 역부족이라는 인식 아래 현실에 순응하고 자포자기해 버린다. 수세기 전의 비극적 인물, 햄릿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템페스트](영국 셰어드 익스피어리언스 극단,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 96년 12월)
예술의 전당은 세계 우수 극단 초청사업의 일환으로 영국 셰어드 익스피어리언스 극단을 초청하여 '템페스트'를 토월극장에 올렸다. 영국을 대표하는 극단으로 선정된 셰어드 익스피어리언스 극단은 각국에 퍼져있는 영국 문화원의 후원으로 세계를 순회하며 수준 높은 공연을 펼침으로서 가는 곳마다 감탄과 찬사를 받아온 극단이다. 토월극장에서의 '템페스트' 공연은 그들의 오랜 전통 속에서 빚어진 노련하면서도 참신한 무대 작업으로 셰익스피어의 말기 작을 충실하게 만들어 내었다. 절제된 배우들의 연기며 번득이는 연출의 기발한 착상들, 그리고 능숙하게 효과를 창출해내는 조명 디자인과 무대장치 등 어디 한군데 나무랄 데 없이 충실하게 조화를 이룬 한편의 수작이었다. 특히 프로스페로의 마법의 힘이 이끌어 가는 섬이라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제시함과 동시에 바닷가의 백사장 효과를 내기 위해 군데 군데 모래를 뿌려 다층적 의미를 만들어 낸 무대 장치가 인상적이다. 잘 훈련된 배우들의 극도로 절제된 움직임과 숙련된 발성으로 관객들의 상상력을 부추기기에 충분했으며, 흰색이 주조를 이루는 사각의 바닥은 오랜 세월 파도와 격랑에 휩쓸려 정련된 백사장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간결한 선과 짙은 녹색계통의 조명을 받은 백색 의상, 그리고 최소한의 소품들의 사용 등은 원시와 문명이 교차하는 프로스페로의 섬을 효율적으로 시각화한다. 자연과 초자연, 현실과 환상, 종속과 자유, 영과 육의 대립 등이 공존하는 '템페스트'의 무대는 정치적 음모와 배반이 잠복하는 어두운 심연이기도 하고, 미란다와 페르디난도 같은 순진 무구한 사랑에 눈이 부신 빛의 낙원이기도 하다. 원작에 숨겨진 상상 속의 온갖 소리와 시각적 장치들이 간결한 무대 장치 속에 녹아들어 있다. 첫 장면에서 숨가쁘게 벌어지는 난파장면을 간결하게 처리된 선과 절제된 배우들의 조형적인 움직임으로 처리함으로서 뒤따르는 장면에서 미란다에게 과거 이야기를 해주는 프로스페로의 차분한 대사와 자연스럽게 균형을 이루게 한 점이라든지, 에어리얼이 움직일 때마다 따라붙는 신세사이저의 영롱한 효과음과 보라색과 푸른색 조명의 사용 등 프로스페로의 마법의 실체를 시청각적으로 오묘하게 묘사해낸 연출의 기발한 착상이 돋보인다. 결말부분에 이르러 자신을 배반했던 동생을 용서해주고 나폴리 왕과 화해를 하며, 그리고 자신이 부렸던 에어리얼과 캘리반마져 해방시키고, 마침내 자신의 운명을 되찾아준 마법의 지팡이까지 집어던지고 밀라노로 향하는 프로스페로의 뒷모습은 관객들에게, 도도하게 흘러간 세월 속에서 지혜와 사랑으로 새 힘을 얻은 한 인간의 완숙미를 보는 듯한 하나의 감동이었다.
[리어 그 이후(Timeless Lear)](1996. 12. 2∼8) / 오경숙·박장렬 작 / 오경숙·박장렬 연출 / 극단 뮈토스 / 오늘소극장
[리어 그 이후]는 1992년에 극단 뮈토스가 초연한 작품이다. [리어 그 이후]는 셰익스피어의 원작 [리어왕]과는 내용 면에서 전혀 다른 것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시대를 불문하고 항상 현대적인 가치를 가진다는 점에서 'timeless'라는 단어를 선택한 새로운 창작극이다. 이 작품의 구성은 프롤로그, 케첩과 마요의 사랑, 에필로그로 되어 있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오경숙이 구성하고 연출했으며, 작품의 주된 내용인 '케첩과 마요의 사랑'은 박장렬 작·연출로 되어 있다.
프롤로그는 왕조의 몰락 이후, 시간이라는 유배지에서 잠들어 있던 리어가 문명이라는 폐허에서 아직 치유되지 못한 정신 분열 상태에서 다시 깨어나고 조명이 바뀌면서 무대는 현대의 주유소 옥상으로 이어진다. 케첩과 마요의 사랑에서 할아버지, 사장, 그의 아들인 안경이 함께 사는 주유소에서 전전하는 연인 케첩과 마요가 등장한다. 이들의 일상은 결코 만족될 수 없는 것이어서 각자의 욕망을 왜곡시키면서 살아간다. 노인은 온종일 주유소 옥상에서 자살을 꿈꾸며, 사장은 여직원과 불륜 관계에 있고, 케첩은 영화 시나리오를 쓰며, 마요는 케첩에 대한 광적인 사랑으로, 이 두 사람의 이상과 현실이 얽혀져 일탈적인 행위들을 유발시킴으로써, 그리고 말더듬이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배우를 지망하는 안경이 아버지의 돈을 훔쳐 안경의 이상인 케첩과 마요, 두 사람과 함께 떠나려 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 가는 것이다. 그러나 케첩과 마요는 안경의 제안을 거부하고 떠나 버리며, 안경은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노인은 언제나처럼 자살을 꿈꾸면서 살아간다. 에필로그에서는 주유소 옥상을 배경으로 리어가 등장하고, 초인적인 모습으로 변모된 리어는 문명이라는 폐허를 헤매다가 고난을 초월한 광대처럼 이 시대를 조소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결국 케첩과 마요를 둘러싼 현대인들의 욕망의 분출구란 이룰 수 없는 꿈을 공상하거나 자살을 꿈꾸는 일밖에 없다는 것으로 귀결되고, 만약 리어가 이 시대까지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그의 비극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치유될 수 없는 광증밖에 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따라서 오경숙과 박장렬은 이 시대 우리들의 비극은 무한한 불행으로부터 빠져나가고자 몸부림치는 것이며, 그 몸부림마저도 산산조각 남으로써 허탈함만이 남는 주유소 인생들의 삶과 왕조의 몰락 이후 고난을 초월한 리어의 이미지가 작품 속에 대비를 이루어 현재에서도 불행은 계속되며, 발전을 전혀 이루어 내지 못하고 다만 시간이 쌓여 갈 뿐이라는 견해를 작품을 통해 피력하고 있다.
[노미오(盧美吾)와 주리애(朱利愛)](1996. 12. 7∼24) / 셰익스피어 작 / 서연호·이승규 공동 번안 / 인천시립극단 / 인천 종합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
[노미오와 주리애]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시대 배경을 우리 나라의 조선조 후기 수원, 안성 또는 강화도로 옮겨와 우리식의 전통 연회와 민속놀이 등을 곁들여 서로 원수지간인 노진사네와 주진사네의 자녀들인 노미오와 주리애의 비운의 사랑 이야기로 꾸며 한국적 분위기를 한껏 연출해 낸 작품이다. 서막을 비롯한 2막으로 꾸며진 [노미오와 주리애]는 격렬한 풍물 소리에 맞춰 막이 오르면 무대 위의 주씨네와 객석에서의 노씨네 사람들이 서로 돌을 던지면서 심한 욕을 퍼붓는다. 양가 사람들이 무대 위에 모여 쥐불 싸움을 하다가 모두 쓰러지면 광대 도창이 무대 가운데로 걸어나와 이 작품의 스토리가 비운의 연인에 대한 것임을 밝힌다. 1막에서 노진사의 외아들 노미오는 친구들과 탈을 쓰고 몰래 주진사의 환갑잔치에 갔다가 주리애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두 남녀는 그날 밤 별당에서 결혼을 맹세한다. 노미오는 다음날 은적암의 무광스님께 주례를 부탁하고 사월 초파일 법회에서 불교의 의식에 따라 도둑 결혼식을 올린다. 수원 장터에서 마주친 주진사의 조카의 칼에 맞아 노미오의 친구가 죽자 노미오는 친구에 대한 보복으로 주진사의 조카를 살해하고 달아난다. 사또는 달아난 노미오에게 추방령을 내린다. 2막에 이르러 광대 도창이 지금까지의 사건들과 닥쳐올 운명을 노래한다. 무광 스님은 노미오에게 강화도로 피신해 있으면 사건을 수습한 후 다시 불러오겠다고 타이른다. 떠나기 전날 밤 노미오와 주리애는 결혼 초야를 함께 보내고 둘은 헤어진다. 주진사가 주리애를 다음날 사또의 친척 박양수에게 혼인시키려 하자 주리애는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무광 스님으로부터 몽환약을 받아 와 자살을 가장하여 칠성각에 안치된다. 길이 막혀 자초지종이 쓰여 있는 무광 스님의 전갈을 받지 못한 노미오는 주리애가 죽었다는 하인의 말에 수원으로 돌아와 칠성각에 나타난다. 노미오는 박양수에게 들켜 칼 싸움 중에 박양수를 죽이고 그 역시 주리애 옆에서 극약을 먹고 자살한다. 잠에서 깨어난 주리애도 노미오의 죽음을 보고 자결한다. 아들의 추방 소식에 상심하여 노씨 부인마저 자결을 한 지경에 이른 주씨네와 노씨네 양가는 무광 스님의 그 동안 있었던 사건의 전말을 듣고 서로 화해하고 죽은 자의 영혼을 비는 영산재를 올린다. 영산재가 진행되는 사이 노미오와 주리애의 혼령이 등장한다.
[마로윗츠의 햄릿] (김윤철 역 / 윤우영 연출 / 극단 은행나무 / 은행나무 소극장 / 97년 1월)
극단 은행나무는 20년전 미국의 연출가 찰스 마로윗츠가 각색하여 비평가들의 열광적인 찬사와 혹평을 동시에 받았던 [햄릿]을 대학로 뒷골목 소극장 거리에 위치한 은행나무 극장에서 올렸다. 타이틀 롤을 맡은 이승훈을 비롯한 젊은 배우들의 진지한 연기와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갓 돌아온 신진 연출가 윤우영의 의욕이 투합하여 한편의 깔끔한 무대를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원작의 스토리를 훼손하지 않은 채 극 구성상의 형식을 변화시켜 각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심리상태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마로윗츠의 햄릿]은 일종의 '메타드라마'적인 기법으로 햄릿의 분열된 의식세계를 차례로 분해한 작품이다. 특히 햄릿의 내면적 갈등이나 고뇌, 그리고 양광 등은 독백이나 방백 등 줄거리의 평면적 구성이 아닌 다른 등장인물들과의 동시 다발적인 개입과 간섭으로 한층 증폭된 채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원작의 중심 주제중의 하나인 '복수'의 주제도 장난감 칼로 상징되는 온갖 조롱과 객기로 펼쳐져 관객들의 명료한 판단력을 끊임없이 훼방한다. 마로윗츠가 각색한 햄릿은 더 이상 귀족이나 왕자가 아니라, 오히려 복수는커녕 자신조차 추스릴 수 없는 무능력한 귀족 지식인으로 그려지고, 그를 에워싼 채 괴롭히는 폭력적 권력 앞에 좌절한 반미치광이 살인자에 다름 아닌 미약한 존재이다.
직선이 강조된 단순한 소극장의 작은 무대의 중앙에 걸려있는 두개의 액자(거울)와 무대 바닥에 그려진 여러 개의 동심원들은 햄릿의 빙빙 돌며 내면으로 몰입하는 햄릿의 심리를 훌륭하게 시각화하고 있고, 윗무대 단위에 설치된 무덤은 시종일관 극의 중심점으로 모든 사건들이 회귀하는 하나의 원지점으로 상징성을 띠며 햄릿의 정신을 제압하고 뒤흔든다. 군데군데 모호한 부분들은 빠른 템포의 장면전환으로 재치 있게 처리되었고, 그를 위해 간간이 햄릿은 천장에서 늘어뜨린 밧줄을 타고 무대 공간을 유영하며 관객들의 시선의 폭을 넓힌다. 한편 느린 템포의 장면들--오필리아의 장례식 장면 등--은 이에 뚜렷이 대비되어 매우 강한 인상을 남기는 효과도 얻고있다.
극단 은행나무의 [마로윗츠 햄릿]은 각색자의 정밀한 통찰력과 세련된 무대감각을 젊은 신예 연출가 윤우영이 놓치지 않고 무대에 올려 신체훈련에 능한 주연배우 이승훈의 노련한 연기와 조연배우들의 열성과 스쥜진의 고른 호흡 등으로 잘 정리된 한편의 수작이다.
[거꾸로 가는 리어―아,부,지!](1997. 4. 10∼6. 15) / 김철홍, 문상운 각색 / 김달중 연출 / 극단 무대에서 바라본 세상 / 하늘땅소극장 1관
셰익스피어의 리어를 통해 부권을 상실한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조망해 보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극단 무대에서 바라본 세상이 97년 4월 10일부터 5월 11일까지 하늘땅 소극장에서 펼친 [거꾸로 가는 리어―아,부,지!]가 바로 그것이다. 각색을 맡은 김철홍, 문상운은 이 공연에서 리어의 광기를 현대적 의미의 치매로, 400년 전 그가 누렸던 권력을 1997년 지금의 돈의 가치로 환산해 보았다고 밝혔다.
작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세 딸을 키워 온 민국은 이제 다 커 버린 딸들의 장래와 결혼 문제를 걱정한다. 돈 때문에 고민하던 그는 달력의 그림을 팔면 큰돈이 될 것이라는 광대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자신의 생일날 그림을 팔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꿈속에서 그림을 팔아 큰돈을 마련한 민국은 그 돈을 딸들에게 나눠주지만, 아첨할 줄 모르는 셋째 딸의 말에 노해 가장 사랑하는 삼순이를 내 쫓는다. 가진 돈을 전부 딸들에게 주고 난 후 일순과 이순의 집을 오가던 그는 이제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를 치매 환자로 몰아 요양소에 집어넣으려는 딸들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가출을 한 뒤 거리의 부랑자와 함께 어울린다. 이제 현실 속에서 민국의 생일날 없어진 그를 찾으러 나선 삼순과 마주친 그는 자신을 왕으로, 그리고 삼순을 리어왕의 셋째 딸 코오딜리어로 혼동한다. 현실의 중압감에 못 이겨 정신이 혼미해져 버린 것이다. 연출을 맡은 김달중은 '유아시절, 우리는 아버지란 존재가 '슈퍼맨'이라고 믿는다.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아버지가 슈퍼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돼도 아버지들은 슈퍼맨 행세를 해야 된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갖고 있는 성격적 결함을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이 갖고 있는 '슈퍼맨이 되고 싶은 성격적 결함'으로 재해석, 아버지들의 비애를 그렸다.'고 말했다.
'자유는 타국에 있고 이 땅이야말로 유배지입니다.'라고 한 대한의 대사에서 벗어나고자 해도 벗어날 수 없고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 하는 이 땅의 아버지들의 운명에 측은함을 느끼게 하는 무대였다.
[초대] (임재찬 연출 / 극단 행동 / 문예회관 소극장 / 1997년 5월)
대학로 한복판 문예회관 소극장에 '초대'된 관객들은 '요원'으로 분장한 젊은 배우들에 안내에 따라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자연스레 '햄릿 재판극'의 배심원이 된다. 연출과 각색을 맡은 임재찬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재판극으로 재구성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햄릿]을 이해하는 전혀 새로운 일면을 제시해 준다. 무엇보다도 이 재판극에서 햄릿은 비극의 주인공도 아닐 뿐더러 더 이상 왕자라는 특권층도 아니다. 다만 충분한 동기를 가질 수도 있는 한 인간으로 살인사건의 한 피의자일 뿐이다.
극의 시작은 원작의 마지막 장면인 햄릿과 레어티즈와의 펜싱시합 장면에서 시작한다. 관객들은 펜싱시합장을 둘러싸고 한동안 서서 관람하게 된다. 이윽고 원작에서처럼 독이든 포도주를 마신 거투루드가 죽고, 잇따라 레어티즈, 클로디우스, 그리고 햄릿이 죽고 난 후, 곧 이어 개선한 포틴브라스 일행이 등장하여 유혈이 낭자한 살인현장을 접수하여 이 끔찍한 살인사건의 책임을 캐는 재판을 열면서 연극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마침내 '요원'들은 관객들에게 의자를 제공하여 자리를 정열 하면서 법정은 모습을 갖추게 된다. 재판장은 포틴브라스, 햄릿 측 변호사는 호레이쇼, 그리고 검사는 오즈릭이다. 햄릿은 오즈릭에 의해 이 모든 살인의 피의자로 기소되고, 이에 반하는 호레이쇼의 열띤 변론으로 연극의 긴장은 고조되어 간다. 그 중에서도 백미를 이루는 것은 극중 극인데, 광대들이 출현하여 재현한 묵극과 극중 극은 햄릿의 심리와 정황에 상당히 근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려지는 판결은 배심원 화된 관객들의 몫으로, 각본에 의해 만들어진 수십 가지 죄목에 대한 유무 죄를 결정하고, 재판장은 이에 따른 형량을 정하는 것이다.
재판 극으로 재구성된 [초대]는 상황설정, 사건진행,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무게 등을 통째로 뒤집어 해체시킴으로서 각 등장인물들에 대한 기존의 관객의 관념에까지 문제 제기를 유도한다. 원작 [햄릿]에서 수백 년간 간과되어온 햄릿의 돌발적 행위에 대한 법 개념의 적용문제라든지, 지속되어온 성격논쟁에 대하여 작품이 결론을 주장하기보다는 '참여한' 관객들로 하여금 판단을 요구한다든지 하는 점이 특이할만하다. 아울러 또 한가지 돋보이는 점은 관객들로 하여금 쉴 틈을 주지 않고 이리저리 유도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요원'들의 진행과 빠르고 경쾌하게, 그리고 때로는 급박하게, 때로는 완만하게 펼쳐지는 장면들의 조화와 균형감이다. 조명과 음향과 함께 어우러진 극의 속도는 현장감을 살린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고,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영상매체를 사용하여 등장인물들의 형량을 스크롤 업하여 보여준 장치와 기둥 속에 갇힌 왕, 왕비,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햄릿의 모습 등은 다큐멘터리 영화의 끝 장면을 연상시키면서 시각적인 효과를 창출한 연출의 재치로 평가할 만 한다.
예술성과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21세기를 바라보는 '미래형 공연집단'으로서의 창단의지를 보여준 극단 행동은 이삼십대의 패기에 찬 젊은 연극인들이 의기로 투합해 참신한 발상과 집중적인 배우훈련, 그리고 치밀한 기획과 공연 준비 등으로 우리나라 공연예술계 전반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노력과 실험으로 더욱 더 주목받는 공연 집단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햄릿이야기](1997. 5. 13∼14 / 1997. 9. 17) / 셰익스피어 원작 / 청주대학교 연극부 각색 / 윤주호 연출 / 청주대학교 연극영화학과 / 국립소극장, 연강홀
젊은 연극인들의 창의와 실험 정신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새롭게 재해석한 이 작품은 개인적인 햄릿의 고뇌보다는 주변 인물들로부터 파생된 환경 속에서 방황하는 햄릿과, 기성세대와 권력층, 가진 자들의 횡포와 암투 속에서 파멸되어 가는 햄릿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광대에게 해설자의 역할을 맡기고 시대를 현대화시켜 우리의 10·26사태와 유사한 상황으로 원작을 재구성해 놓았다.
선왕의 사인에 의혹이 있다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거투르드 왕비, 현왕 클로디어스, 폴로니어스 사이에 햄릿의 왕위 계승 문제로 긴장감이 감돈다. 햄릿의 왕위 계승을 위해 시동생과 결혼하고 심지어 재상 폴로니어스와 동침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왕비는 왕의 심복 로즌크란츠와 길든스턴 마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수완을 발휘한다. 어머니의 침대에 있던 폴로니어스를 살해한 햄릿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녀의 물불 안가리는 권력욕에 대한 회의,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해야 하는 중압감 등으로 괴로워하다 충동적으로 오필리어를 강간한다. 오필리어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왕비는 이를 비밀에 부치고 그녀가 낳은 아이도, 그녀도 죽음으로 몰고 간다. 군사령관 레어티즈가 왕의 사주를 받아 원수를 갚기 위해 햄릿과 결투를 벌이다 왕, 왕비, 햄릿, 레어티즈는 모두 죽게 된다. 이때 호레이쇼가 무장병을 이끌고 권력을 장악한 후 레어티즈가 역모를 꾸며 왕가를 몰살시켰으므로 당분간 질서 유지를 위해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겠다고 하는데서 막이 내린다.
원작에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 문제로 갈등하는 햄릿을 그리고 있는 것과는 달리 [햄릿이야기]에서는 권력에 강하게 집착하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과 그 소용돌이 속에서 파괴되어져 가는 햄릿을 그리고 있다. 무대 중앙의 대형 스크린과 양쪽에 놓인 여러 대의 TV를 통해 보여주는 화면들과 철 구조물들이 그가 처한 삭막하고 살벌한 상황을, 그리고 그 속에 서서히 침몰해 가는 햄릿의 의식을 강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십이야(What you will)] (1997. 5. 15) / 셰익스피어 원작 / 박준용 연출 /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 국립극장 소극장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는 제 5히 젊은 연극제 참가 작품으로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를 선택, 고전의 현대화와 대학 실험 정신의 고양이라는 젊은 연극제의 취지에 맞추어 원작이 갖고 있는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이 내재된 풍자성을 현대적 시각으로 다시 나타내 보였다. 원작의 내용과 같은 구성을 가지면서도 시대 배경을 현대로 옮기고 배우들의 이름을 나몽상, 도도해, 한잔해, 오해매, 지잘난 등으로 코믹하게 부르게 함으로써 현대 언어로 희극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원작과 배역의 차이라면 오시노공작을 시장으로, 마리아를 올리비아(도도해)의 친구로 말볼리오(지잘난)를 올리비아집의 변호사로, 앤드류 경은 부자집 자제인 재미교포로, 안토니오를 시청에서 난동을 부려 수배 중인 인물로 설정한 것이다.
극은 원작과 같이 전 5막으로 개그맨이 등장하여 이 작품이 '사랑'에 관한 것이며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정신을 이어 나가게 하는 최고의 묘약이 바로 사랑이라며 작품의 프롤로그를 장식하고 비행기 추락 사고로 헤어진 쌍둥이 남매 중 여동생이 오빠를 찾을 셈으로 남장하여 시장의 비서로 채용된다. 시장이 사모하는 부잣집 처녀 집에 시장의 구애를 전하러 찾아가면서 해프닝이 생긴다.
한양대학교는 원작 [십이야]의 주제가 '피상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자기애적인 광기는 비웃음거리가 될 뿐, 진실한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동조하여 원작에서 볼 수 있는 왜곡된 사랑의 양태들이 오히려 지금 우리 시대에 더욱 일반적이며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인식하고 우리 신세대들의 감각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무책임하고 우발적인 인스턴트식의 사랑관에 대한 풍자적 이야기로 옮겨 놓았다.
[리허설 말괄량이 길들이기](1997. 5. 16∼9. 14) / 셰익스피어 작 / 이지원 연출 / 상명대학교 연극학과 / 국립극장 소극장, 연강홀
상명대학교 연극학과는 올해 5월에 있었던 젊은 연극제와 9월의 세계대학연극축제에 [리허설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가지고 참가했다. 상명대는 원작의 구성은 그대로 두면서 서막을 재구성하여 원작과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이루어 냈다. 즉 서막의 배경을 1997년의 서울로 설정, 박씨라는 인물이 아들의 연극 리허설을 보러 감으로써 원작의 1막으로 연결시킨다. 연출은 리허설이라는 개념을 작품에 시도한 목적을 극중 극의 특징을 살리면서 관객들에게 자유로운 상상력의 범위를 확장시켜 보고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리허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말괄량이의 길들여짐이 남성과 여성의 근본적인 힘의 우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실한 사랑과 신뢰로 형성된 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무대였으며, 공연 자체가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맥베드](1997. 5. 17 / 1997. 5. 22∼25) / 셰익스피어 작 / 성종훈 연출 / 이윤환 드라마트루기 / 동국대학교 연극영상학부 / 국립극장 소극장, 동국대 학술문화회관 소극장
동국대학교의 [맥베드]는 컴퓨터 게임의 양식으로 [맥베드]를 재구성했다. 컴퓨터 게임으로 재정비된 이 작품은 줄거리가 원작과 같은 흐름으로 진행되다가 게임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억압받고 그 형식과 법칙에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사에 대한 패러디다.
뱅코우는 맥베드가 왕이 된 후에 행동에 변화를 보이고 뱅코우의 자손들이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권좌에 앉아 있는 맥베드는 뱅코우를 시샘하며 불안해한다. 따라서 그는 뱅코우를 총살한다. 사회자가 마술 쇼를 진행할 때 머리에 치명상을 입은 당컨과 뱅코우의 망령이 나타나고 맥다프가 맥베드를 처참히 살해한 후 맬컴이 왕좌에 오른다. 에필로그에서 맥다프가 왕좌에 오른 맬컴을 죽이고 다시 반역의 왕좌를 차지하고 다시 컴퓨터 오락 게임을 처음 시작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무엇보다도 피비린내 나는 섬짓한 분위기가 극을 압도하는 이 공연의 등장 인물은 게임 자키, 맥베드, 맥다프, 뱅코우, 맬컴, 레이디 맥베드, 세 마녀, 코러스 6명이며, 극 구성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합하여 총 20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섯 번에 걸쳐 게임 자키가 등장, 작품 설명과 장면 연결을 진행을 한다. 작품 속에서 맥베드와 맥더프가 반역을 저지르기 전에 주저할 때 게임 자키는 그들을 위협하며 프로그램대로 살인할 것을 강요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세팅되어 있는 오락 게임의 공식대로 왕과 왕자를 시해하는 반역은 예정된 운명처럼 뒤바꿀 수 없으며 계속해서 오늘날까지 악순환 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오늘날 현대 사회의 냉혹함과 잔인함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리어](1997. 5. 18 / 1997. 9. 9) / 김관 연출 / 김관, 엄국천, 권정희, 한순희, 하덕부 각색 / 중앙대학교 연극학과 / 국립극장 소극장, 연강홀
중앙대학교의 [리어]는 외국 고전 작품의 한국적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셰익스피어 시대의 무대 정서와 기교를 한국의 신화적, 무속적 원리로 표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고전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리어를 제외한 등장 인물들의 우리식 이름, 신관의 등장, 우리 고유의 창과 악기 사용 등으로 원작의 분위기를 완전히 한국화한 것이었다.
차기 왕을 결정하는데 신관의 역할이 컸던 아주 오래 전 시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객석으로부터 등장한 신받이들이 행하는 시작 굿으로부터 시작된다. 리어는 성급함 때문에 사랑하는 셋째 딸 아사를 쫓아내고 원작대로 두 딸의 배신에 분노하며 광야에서 울부짖는다. 리어에게 추방당한 신관 청부루(글로스터 백작)도 자신의 서자 구름의 계략으로 장님 신세가 되고 리어의 세 딸과 대모수리(콘월), 구름의 죽음으로 이 극은 종국으로 치닫는다. 신받이들이 이들의 상여를 둘러메고 그들의 혼을 달래려 씻김굿을 올리면서 막을 내린다.
이와 같이 중대의 [리어]는 원작을 많이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굿으로 시작해서 굿으로 끝을 내는 극의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원작의 광대를 대신하는 해, 달, 물, 불, 흙이라는 산받이들이 공연 내내 무대의 양쪽에 자리하고 앉아 창이나 장고, 북 등을 이용해 극의 내용을 설명하고 노래, 춤 등을 보여주는 희랍극에서의 코러스 기능을 너머 등장 인물들과 대거리를 하면서 관객의 입장까지 대변해 주는 적극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무대와 객석의 거리를 좁혔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깨달음을 얻게 되는 리어가 겪는 상황의 부조리성, 우리 시대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리어의 세계를 구성하는 각 인물들의 욕망을 표출하는데 역점을 두어 [리어]를 지금 우리 시대에 있을 수 있는 비유적 이야기로 그림으로써 원작이 주는 극의 현재성을 연출해 내고자 했다는 연출의 변만으로도 이 극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아가 사랑하는 딸의 주검을 부여안고 탄식하는 리어에게서 아버지로서의 회한과 혼자 살아 남아 그 모든 것을 감내 해야 하는 고통의 무게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무대였다.
[실수연발](1997. 6. 13∼29 / 1997. 11. 28∼12. 25) / 셰익스피어 작 / 이근삼 역 / 이승규 번안·연출 / 인천시립극단 / 인천종합문예회관 소공연장, 연강홀
인천시립극단의 세미 뮤지컬 [실수연발]은 일차적으로는 셰익스피어의 한국화가 번안의 목적이겠으나 부제가 [셰익스피어 인천에 오다]이듯이 외국 희곡의 인천화를 목표로 원작을 개작하여 백제 때의 인천을 무대로 번안한 이색적인 공연이었다. 이러한 지방 연극인의 노력은 자신들이 활동하고 있는 지방에서의 자리 찾기의 의지로 보여진다. 이승규 번안의 [실수연발]이 1994년 인천종합문예회관 소공연장에서 초연 되었을 당시 인천에서 최장기 최다 관객 동원을 기록한 성공적인 작품으로 인정받았고, 1997년 6월에 또다시 인천시립극단 정기 공연으로 같은 장소에서 재공연 됐다. 인천시립극단의 상임 연출가 이승규는 셰익스피어의 [실수연발]을 남북 분단 시대의 이산가족이라는 한국적 테마로 재창조했다. 그는 원작의 기본 구성은 어느 정도 유지한 채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백제 시대의 인천 즉, 미추홀로 옮겨와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 시대 상황에 비추어 오늘날 우리 나라의 남북 분단 상황하에서 이산가족의 아픔과 재회의 기쁨을 원작의 상황과 연결시켜 13곡의 노래, 사물 장단, 고유 의상 등으로 우리의 정서에 부합되는 희극으로 꾸몄다. 또한 그는 이 공연의 메시지를 '가족의 소중함'으로 보고 이것을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가치관으로 규정했다.
전 5막으로 구성된 이 극의 내용은 몇 십년 전 뿔뿔이 헤어진 가족을 찾아 적국 백제에 무단 입국한 고구려 상인 한지온이 체포되어 간첩 혐의로 사형 언도를 받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여러 해전 배를 타고 여행하다가 난파되어 여러 나라로 뿔뿔이 헤어져 살던 한지온의 식구들은 우연히 미추홀에 모여들게 되고, 아들 쌍둥이와 하인 쌍둥이,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이들을 혼동하면서 갖가지 실수가 생긴다. 아내가 시동생을 남편으로 오인하고, 하인들은 자기 주인이 시킨 심부름의 결과를 다른 주인에게 보고하여 영문을 모르는 주인으로 하여금 화가 치솟게 한다. 심지어 아내는 남편이 돌았다고 생각하여 법사를 모셔다가 치료를 시도하기까지 한다. 결국 아버지인 한지온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도중 주지승이 된 아내와 아들 그리고 자신의 하인들을 알아봄으로써 극에 달한 대혼란은 정돈되고 이산가족이 되었던 한 가족이 한데 모여 재회의 기쁨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막이 내린다.
[실수연발]은 올해 6월 인천에서의 공연 이후 12월에는 서울 연강홀 우수 연극 초청 시리즈로 인천시립극단과 연강홀의 공동 작업으로 우리의 신명나는 사물놀이 장단과 고유 의상이 한국적 정서를 더욱 자극하고 무대 배경과 의상은 삼국 시대지만 극의 템포, 연기, 말투는 현대화하여 록 스타일의 노래도 10여 곡 새로 만들어 배우들이 직접 부르게 하는 세련된 무대를 꾸며냈다.
[한여름 밤의 꿈](1997. 9. 1∼7) / 셰익스피어 작 / 이종훈 연출 / 서울시립뮤지컬단 / 세종문화회관 분수대
'97 서울/경기 세계연극제 국내 음악극 공식 초청 공연 부문에서 세종문화회관 기획으로 서울시립뮤지컬단이 세종문화회관 분수대에서 무료로 뮤지컬 [한여름 밤의 꿈]을 선보였다. 서울시립뮤지컬단이 극단 명을 서울시립가무단에서 서울시립뮤지컬단으로 바꾸면서 한국적 전통미를 살린 음악극을 공연하던 기존의 공연 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폭넓게 대중적인 뮤지컬을 수용한다는 취지로 제작한 뮤지컬 [한여름 밤의 꿈]은 큐피드의 화살에 맞은 세 쌍의 연인들과 숲 속의 요정들이 야외에서 펼치는 원작에서의 세계를 춤과 노래와 시가 있는 로맨틱 뮤지컬로 보여주었다. 이들은 원작의 내용을 바탕으로 탁 트인 공간에서 악단의 라이브 연주가 펼쳐지는 가운데 투명 바닥을 설치하여 바닥 면의 변화를 통해 색다른 무대 변화를 추구하고 분수와 분수대 아래에 별도 설치된 조명으로 환상적 시각 효과를 자아내는 다이내믹한 무대를 연출해 냈다.
[오셀로](1997. 9. 7) / 이태주 번역 / 박준 연출 / 단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 국립극장 소극장
원작 [오셀로]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에서도 극 전개와 비극의 발단이 부부의 사랑과 질투에서 비롯되는 가정 비극에 해당하며 다른 비극들보다도 현대적 해석이라든가 독특한 작품 해석의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라 하겠다. 물론 우리 나라에서 1961년에 임춘앵 여성국극단이 [오셀로]의 무대를 우리 나라로 옮겨와 천민이 양반 출신의 처녀와 결혼하여 질투와 오해로 인해 아내를 죽이고 그가 회개하자 두 사람이 천상에서 재회한다는 내용으로 서양의 고전을 한국의 정서로 풀이한 창무극 [흑진주]의 경우가 있기는 하였으나 이후 거의 새로운 해석의 대상에서 멀어져 있었던 때문이거나 원작과의 문화적 차이나 흑 백간의 인물이라는 특이성이 그러한 시도를 제약하고 있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원작 [오셀로]는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볼 때 코믹적 요소나 환상적·초자연적 요소가 거의 없다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가 될 것이다. 이러한 연유 때문인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원한 테마인 '사랑'을 부각시켜 현대인들의 공감대를 얻어냈고, 원작의 시·공간적 배경 중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장면을 과감하게 삭제했다. 또한 세트, 의상, 조명 등 볼거리를 제공하였고 현대적 연극 언어로써 비극의 원인을 이아고의 성격 묘사보다는 오셀로의 개인적인 콤플렉스와 그로 인해 부딪치는 인물간의 충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무대화함으로써 비극의 주인공들의 모습이 오늘의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King Lear](1997. 9. 10∼15) / 셰익스피어 원작 / 김정옥 연출·구성 / 극단 자유, 극단 유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
세계연극제 기간 중에 극단 '자유'와 극단 '유'의 단원들을 중심으로 김정옥이 무대에 올린 [King Lear]는 '세계연극제'라는 말에 걸맞게 미국, 독일, 일본, 멕시코, 불가리아의 배우들이 함께 참여한 그야말로 다국적 연극이었는데, 이 작품은 다국적 연극답게 6개국의 배우들이 자국의 언어로 대사를 읊는다. 우리 민속 연희의 연극적 요소를 극 속에 삽입하는데 능한 연출자 김정옥이 시대 배경을 2천년 전으로, 공간 배경을 한반도와 만주 일대, 일본으로 설정해 한국적 굿판과 서구의 정서가 함께 어우러지는 작품을 만들겠다고 의도했던 바대로, 원작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배우들의 집단 창작을 통해 서양과 동양의 조화를 이뤄 낸 [리어왕]이 탄생했다.
리어왕과 그의 세 딸들, 사위들이 등장함으로써 시작되는 극의 초반부에 팬터마임을 이용해 앞으로 전개될 사건들을 보여 준다. 리어가 두 딸들에게 실권을 넘겨주고 셋째 딸 코오딜리어와 충신 켄트를 추방한다. 그리고 다섯 명의 광대가 등장, 좀 전에 일어난 일들을 풍자하며 인간들의 우매함과 독선, 그리고 광대들의 간언을 묵살한 리어에 대한 원망 등을 늘어놓는다. 이때 다른 광대들이 리어, 거너릴, 리이건, 코오딜리어, 에드먼드의 시신을 메고 등장한다. 이들의 시신을 가운데 두고 영혼을 달래는 살풀이굿이 벌어진다. 극의 마지막에나 있음직한 일들이 미리 나타내어지는 것이다. 결국 질투에 의해 죽음을 맞는 거너릴과 리이건 형제간의 결투로 숨을 거두는 에드먼드, 그의 계략에 의해 죽게 된 코오딜리어를 부둥켜안고 울부짖다 최후를 맞는 리어, 이렇게 피로 얼룩진 이 극의 마지막에 광대들이 이들의 시신을 묻고 무대를 떠난다.
이 극이 공연되기 전 다국적 배우들에 의한 공연에 대해 일각에서는 우려의 소리도 없진 않았으나, 극의 초반부에 팬터마임을 삽입하고 사건 전개상 후반부에 있을 광대들의 살풀이굿을 미리 보여준 부분에서 관객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연출의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다. 더욱이 이 공연에서 특이한 점은 기존의 [리어왕]의 공연들에서는 한 명의 광대가 등장, 극의 청량제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 역의 비중이 미미한 편이었으나, 이번 공연에서는 광대의 무대적 기능을 한층 강화시켰다는 것이다. 광대의 수를 늘이고 광대가 원작에서 늘어놓는 우스꽝스럽지만 가시 있는 대사를 살리면서 그들이 펼치는 춤을 통해 시종 무겁고 비극적일 수 있는 이 극에 숨구멍을 터놓고 있다.
[암로디 영웅담(The Amlodi Saga)](1997. 9. 11∼13) / Sveinn Einarsson 각색·연출 / 아이슬란드의 반다멘 극단 / 문화일보홀
세계연극제 기간동안에 그 동안 대하기 쉽지 않았던 아이슬란드 연극을 모처럼 대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이슬란드에서 온 반다멘 극단의 [암로디 영웅담]이 바로 그것이다. 주로 신화에서 소재를 따온 작품을 선보여 왔던 연출자 스와인 에너슨은 이번에도 역시 북유럽에 널리 알려진 암로디 왕자 설화를 그 소재로 삼았다. 이는 아이슬란드판 [햄릿]이라고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유사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선왕의 사인(死因)이 밝혀지지 않은 채, 그의 동생 호웬들이 왕위를 계승한다. 그 축하연에서 선왕의 아들이자 현왕의 조카인 왕자 암로디(Amlodi)가 파티를 망쳐 버린다. 암로디는 현왕이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인 암바 왕비를 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대신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현실을 외면하려 한다. 얼마 후 여성 예언가가 나타나 깨어나지 않은 자가 오랫동안 잠을 잘 것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예언을 한다. 이때 왕이 개선하는 가말리엘을 맞느라 그녀에게 소홀히 하자, 분노한 예언가는 그가 여성과의 성생활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 암로디에게 그가 온화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지녔음을 일깨운다. 현왕과 총리 가마리엘은 암로디가 눈에 가시지만, 그를 처치하기에 앞서 왕비와 결혼해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한다. 드디어 결혼식이 거행되고 왕과 총리는 암로디를 해외로 보낼 계략을 꾸민다. 결혼식 내내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암로디에게 어릿광대가 그리스의 가면을 주고 '암로디'라는 이름이 '유복한 한량' 즉 자기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히는 미친개라는 뜻이라며 현실 도피적인 그의 행동을 비꼰다. 이에 왕자는 이제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 천명한다. 왕비의 침실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기로 되어 있던 암로디는 자신의 어머니를 성폭행하려다 죽음을 맞는다. 그의 죽음으로 왕과 가말리엘은 수세에 몰린다. 드디어 정의를 실현하려는 자들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또 다른 모습의 암로디가 비극적 결말을 예견하면서도 정의의 편에 서서 싸우다 장렬한 죽음을 맞는다. 인간의 권력에 대한 허망한 집착과 애욕, 이 모든 신기루들이 사라지고 정적만이 남았다. 이제 예언가는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예언코자 한다. 희망적일지 허망한 꿈일지 알 수 없는 새 세상을, 비장감을 느끼게 하면서 끝이 나는 이 공연에서 반다멘 극단은 고대 북유럽 특유의 샤머니즘적 요소와 랩으로 된 대사, 신나는 전통적 비키바키춤 등을 선보이면서, 비극적이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려내고 관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좀처럼 대하기 힘든 북유럽의 연극을 맛 본 귀한 무대였다.
[맥베드](1997. 11. 19∼26) / 셰익스피어 작 / 김동현, 길해연, 선종남 대표 구성 / 김동현 연출 / 극단 작은신화 / 여해문화공간
극단 작은신화는 '고전 넘나들기'의 기획 시리즈를 선정하여 이미 명작으로 고정 관념화된 원작을 시공을 뛰어넘어 시대 변화와 호흡을 같이하는 연극을 만들고자 했다. 따라서 그들은 11월과 12월 연말에 [맥베드]와 [햄릿]을 잇따라 무대화했다. [맥베드] 공연에서는 외국에서 예술 감독 에릭 둥헨을 초빙하여 의상, 조명, 무대 등의 디자인을 맡겼다. 에릭 둥헨은 무대 양옆에 핏물과 녹슨 갑옷과 같은 이미지의 녹슨 윙들을 걸어 놓고 그것들을 왕권으로 대치하여 최고의 가치를 소유하고자 하는 맥베드의 피비릿내 나는 외로운 경주를 개별적인 작은 조명으로 처리하였으며, 그는 이러한 외로운 조명을 받는 각 인물들이 때론 하나의 섬이 되기도 하고 때론 다른 전쟁의 어둠을 비추는 작은 빛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배우 일곱 명이 1인 2-4역으로 15명의 역을 소화해 내고 있는 이 공연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5막으로 만들어지긴 했으나, 고전이 오늘의 시대 변화와 호흡을 같이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는 취지로 '소리'라는 청각적 이미지를 각 막의 제목으로 통일 ― 여는 막 소리의 숲, 1막 내면의 소리, 2막 분열의 소리, 3막 떠도는 소리, 닫는 막 사라지는 소리 ―하여 욕망의 소리를 뒤쫓는 맥베드와 맥베드 부인의 심리를 중심으로 현대의 세계 속에서 저마다 소란스레 역할 놀이를 하다가 결국 사라지는 허무한 인간의 모습을 맥베드가 텅 빈 무대에 혼자 남아 읊조리는 독백 속에서 배어 나오게 했다.
[햄릿](1997. 11. 28∼12. 6) / 셰익스피어 작 / 신정옥 역 / 공동 구성 / 반무섭 연출 / 극단 작은신화 / 여해문화공간
작은신화는 고전 넘나들기 기획시리즈로 [맥베드]에 이어 [햄릿]을 공연했다. [햄릿]공연 역시 [맥베드]와 마찬가지로 셰익스피어가 하고자 하는 얘기를 현시대에서 가장 정확하게 할 수 있는 표현 방법은 현 시대에 걸맞게 표현하는 것이라는 시각으로 현대의 시청각적 무대장치를 짜임새 있게 활용하여 장면과 대사의 효과를 한층 더 끌어올리고자 한 것이었다. 먼저 작은신화의 [햄릿]의 구성은 5막의 원작을 총 23장으로 나누어 성곽이나 묘지의 광대 장면 등을 과감히 생략하고, 각 장마다 원작의 장면을 극도로 생략 단순화하였으면서도 전체 내용은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게 재구성한 것이었다. 다만 마지막 23장에서 포틴브라스의 등장을 없애고 햄릿이 클로디어스를 죽인 후 자신도 죽는 장면에서 단순히 극을 종결시켰다. 즉 원작의 결말이 주는 지도자가 없는 길 잃은 국가에 대한 구원의 메시지가 생략된 것이다. 작은신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원작의 등장 인물의 수를 줄여 전부 10명의 배우가 16명의 역할을 소화해 내도록 하였다. 특이한 것은 몇 개의 장면에서 왕과 왕비, 폴로니어스가 가면을 쓴다는 것,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레어티즈가 왕을 찾아 왔을 때 죽은 폴로니어스의 혼령이 나타나 아들에게 행동에 신중을 기하라고 당부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작은신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평소 별다른 비판 없이 수용하고 행했던 것들로부터 스스로 자신을 관조할 수 있도록 유도해 보자는 측면에서 왕과 왕비, 폴로니어스 등이 미친 척 하는 햄릿의 행동을 훔쳐보거나 극중 극이 진행되는 동안 왕의 반응을 지켜보는 햄릿 등의 장면에서 볼 수 있는 소위 지켜보기와 보여주기의 행위, 이 두 행위의 교차와 대비, 대립을 부각시켰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연극이 새로운 햄릿의 해석은 아니지만 이제껏 우유부단의 전형으로서 올바른 판단을 하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햄릿보다는 수많은 행동을 저지르는 햄릿, 그로 인해 고뇌하고 사유하는 햄릿을 보여주려고 했고, 햄릿의 행위가 어떻게 복수를 할 것인가에 대한 단순한 고뇌가 아닌 복수의 이면에 내재된 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보고 햄릿을 통해 삶에 있어서 끊임없이 이상적 방향으로의 극복을 모색해 가는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에 역점을 두면서도 결국 그러한 이상적 시도들이 한계 상황에 부딪쳐 실행되지 못하게 됨으로써 원치 않는 비극에 직면하고 만다는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