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한국 공연 1998. 1 ∼ 1998. 12
신정옥 (명 지 대)
김동욱 (성균관대)
오수진 (명 지 대)
{레이디 맥베스}(1998. 1. 15 ∼ 28) / 한태숙 각색·연출 /
극단 물리 / 문예회관 소극장
신선한 충격! 극단 물리의 창단 준비 공연이었던 {레이디 맥베스}에 대한 소감이라 할 수 있겠다. '오브제 연극'이라는 부제가 말해 주듯이 이 극은 단순히 대사로 이뤄진 연극이 아니다. '오브제'라는 말 그대로 '물체'가 이 공연에서는 단지 수동적인 무대 세트로만 남아있기를 거부하고 배우는 물론이고 무대세트, 효과 등 여러 몫을 거뜬이 해내고 있다.
이 극은 {맥베스}를 텍스트로 하고 있으면서 레이디 맥베스에 초점이 맞춰져 한태숙에 의해 각색·연출되어졌고, 그동안 '밀가루시리즈'를 통해 물체극 예술가로 알려진 이영란이 오브제 제작뿐 아니라 직접 행위자로 나섰다. 이영란과 간혹 호흡을 맞춰왔던 배우 서주희가 레이디 맥베스로 분하고, 국악과 양악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원일이 음악을 맡았다. 등장인물이라고는 레이디 맥베스와 행위자 세명이지만, 결코 초라하거나 엉성한 무대가 아니다.
{레이디 맥베스}는 레이디 맥베스가 남편을 사주해 왕좌에 앉혔지만, 그후 죄인 컴플렉스, 가해자 컴플렉스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상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약해지는 남편을 독하게 몰아부쳤던 그녀, 던컨왕 살해 후 그토록 원하던 옥좌를 차지했지만, 그녀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이던가! 죄의식으로 환영과 몽유병 증세를 앓게 된다.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전의가 최면으로 과거의 기억을 토해내게 하는 과정에서 맥베스 부부의 범죄행위가 밝혀진다. 과거와 현실을 넘나들면서 레이디 맥베스는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는 욕구와 속시원히 털어버리고픈 본능사이에서 괴로워한다. 마침내 살해장면을 떠올린 그녀는 막연히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것의 실체가 다름아닌 자신의 양심이었다는 자각에 이르른다. 그후 그녀는 여생을 속죄를 갈구하며 보낸다.
이러한 내용이 전달되는 내내 진흙, 밀가루, 종이 등이 주요 오브제로 이용되고 있다. 진흙은 무대 중앙에 사람형상의 부조와 반신상으로 만들어져 던컨왕 살해장면을 극적으로 표현해 주었고, 레이디 맥베스의 얼굴을 뒤덮기도 하고 뱀의 형상으로 그녀의 목을 휘감은 밀가루반죽은 죄의식의 괴로움에 질식한 것 같은 그녀의 내면을 시각화하고 있다. 두줄로 연결된 종이인간들은 마치 유령이 되어 맥베스부부를 옥죄는 듯 하다.
거기에 허밍과 같은 소리와 다양한 타악기, 대금을 이용한 음악은 장면전환과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있어 또 다른 대사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이렇듯 기존의 대사의존의 연극과 달리 압축된 대사, 오브제의 적절한 활용, 효과적인 음악, 행위자들의 움직임 등 독립된 개체들의 균형적 공조(共助)로 이뤄낸 하나의 작품, 그것이 바로 {레이디 맥베스}라 하겠다.
{오셀로}(1998. 2. 11 ∼ 20) / 샘 맨더스 연출 /
로얄 내셔널 씨어터 /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영국이 자랑하는 국보급 극단 로얄 내셔널 씨어터가 야심에 찬 계획으로 제작하여 세계 순회공연중인 {오셀로}가 예술의 전당과 문화방송 공동주최로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막을 올린다. 이 공연은 무엇보다도 신예 연출가 샘 맨더스의 깔끔한 연출이 돋보이는 수작으로, 이미 일본 공연에서 전회 매진이라는 기록으로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독창적인 개작이나 센세이션한 실험적 각색이라는 미명아래 원작의 문학성과 공연성을 섣불리 훼손하는 우를 범하곤 했던 종래의 공연과는 달리, 젊은 연출가 맨더스는 원작의 키 포인트라 할 '질투심'이라는 다분히 단순하면서도 정신분석학적인 주제를 확대하여 무대 위에서 세밀한 터치로 분석해 보이고 있다. 맨더스는 영국의 권위 있는 연극상인 올리버 상을 두 차례나 수상하여 일찌감치 차세대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주목을 끌었고, 특히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인기 절정의 뮤지컬 {올리버}의 연출자로도 유명하다.
주인공인 오셀로 역을 맡은 데이비드 헤어우드는 영국 최고의 연극예술 교육기관인 RADA (Royal Academy of Dramatic Art) 출신으로 힘에 넘치면서도 고도로 절제된 연기로 열연하여 관객들의 갈채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렁차면서도 호소력 있는 그의 발성과 절도 있으면서도 섬세한 그의 연기는 오셀로라는 이방인의 내면에 동시에 공존하는 인간의 강함과 연약함이 매우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유연한 대사와 연기로 포장되어 전달되는 그의 내면연기는 가히 전율적인 감동으로 관객들의 심금을 울린다. 한편 상대역인 이야고 역으로 열연한 사이먼 러셀 빌은 캠브리지(Cambridge) 대학과 길드 홀 음악/연극원(Guildhall School of Music and Drama) 출신으로 에딘버러(Edinburugh) 의 트라버스 극단(Traverse Theatre) 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로얄 셰익스피어 극단(Royal Shakespeare Company) 의 협력배우로 활동한 베테랑이다. 특히 악역에 능한 그의 연기는 이야고 역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헤어우드의 볼륨있는 연기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특히 3막에서 우연히 주운 손수건으로 오셀로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에서의 열연은 관객들로 하여금 희극적이면서 동시에 비극적인 정서에 흠뻑 젖어 들게 만든다.
앤소니 워드(Anthony Ward)의 무대 디자인은 매우 단순한 형태로 윗 무대는 블라인더를 길게 내린 듯한 2층 구조물로 모든 사건이 진행되는 장소가 은밀한 실내라는 점을 암시해 주고 있으며, 또한 필요에 따라 몇 가지의 소품으로 전환되는 다양한 실내 공간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보기 어려운 인간의 내면세계를 엿보게 해주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여기에 멀리서 자그맣게 들리는 풀벌레 소리까지 준비한 사이먼 베이커(Simon Baker)의 섬세한 음향과, 강한 비트와 감미로운 멜로디를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한 패디 쿠닌(Paddy Cunneen) 의 음악,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게 이어지는 폴 파이언트(Paul Pyant)의 조명 등은 샘 맨더스의 깔끔한 연출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클레어 스키너(Claire Skinner) 가 맨발로 열연한 데스데모나는 다소 현대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질투의 화신으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오셀로의 비극적 행위가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개연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데 일조를 한다. 그 외의 배우들도 모두 훈련이 잘된 일급배우들이라 무대 위에서 내뿜는 그들의 열기는 가히 관객들을 압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런던에서도 이만한 수준의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감상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이번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의 공연은 놓치면 아까울 공연이라는 생각에 아무런 주저함도 없다.
예술의 전당 개관 10주년 기념 해외 우수단체 초청공연의 일환으로 영국을 대표하는 국립극단인 로열 내셔널 시어터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가지고 내한하여 연일 매진행진을 이끌어내는 인상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로열 내셔널 시어터의 이번 {오셀로}공연은 1997년 영국 연극계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되었던 것으로 뮤지컬 {올리버}의 연출로 유명한 샘 맨데스의 뛰어난 연출력과 연기자들의 섬세한 심리묘사 연기를 실감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원작의 텍스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시대를 17세기에서 1930년대의 영국으로 설정, 현대적 의상과 소품, 간결한 무대장치 등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시대의 괴리감을 완화시킨다. 단순한 무대는 후면 중앙에 2층 구조물을 교묘히 활용함으로써 신속한 장면전환의 유연성을 보이고 천정에 매달린 선풍기는 비극적 운명의 소용돌이를 상징하듯 끊임없이 천천히 돌아간다. 상징적인 현대 의상은 단색으로 간결한 느낌을 준다. 데스데모나는 극의 초반·중반·후반부에 각각 적·청·흑색의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옴으로써 그녀의 청순한 여성미와 비극적 운명을 암시하고, 오셀로의 흰셔츠는 그의 근육질 검은 피부를 더욱 선명히 드러내 보인다. 타악기, 신시사이저, 트럼펫을 이용한 라이브 음악은 극의 현장감과 강렬한 인상을 고조시키고 주요장면은 주로 밤에 이루어지게 하면서 절묘한 조명의 명암효과로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끌어갔다.
일반적으로 {오셀로}공연은 이아고 연기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과는 달리 이 공연에서는 오셀로 역을 맡은 흑인배우 데이비드 헤어우드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하는데 이는 뚱뚱한 중년의 이아고에게서는 강한 악마적 인상보다는 오히려 평범한 직업군인의 인상과 그가 복수를 다짐한 후 서서히 간계와 음모로 오셀로를 비극으로 몰고가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로열 내셔널 시어터의 {오셀로}는 치밀하게 계산된 (무대)연출력과 음악, 무대, 소품, 의상 등의 현대적 세련미가 돋보이고, 차분하면서도 절제된 힘이 느껴지는 공연이라 하겠다.
{바라해라}(1998. 3. 13 ∼ 4. 19, 6. 15 ∼ 7. 12) /
연우소극장 / 카페 언더그라운드
연극 {바라해라}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모티브를 따옴으로써 젊은 남녀의 애절한 사랑과 죽음이 극 전체의 줄기를 형성하고 있기는 하지만 원작의 스토리와는 전혀 다른 구성을 가진 하나의 실험적 창작극이다.
극의 프롤로그는 행위 예술가 미아가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관객들과 배우전원을 이끌고 벼랑의 담벼락을 지나가는 행위예술을 하면서 극장 안으로 들어온다. 극이 시작되면 쓰레기 봉투가 쌓인 공원에서 해라가 애타게 바라의 이름을 외치며 그를 찾아다닌다. 극의 내용은 분단의 역사를 갖고 있는 국가의 대통령이 암살되자 계엄령이 선포된다. 대통령의 암살에 연루된 정치경제의 대부이자 차기 대권 후보인 K그룹회장은 암살관계를 눈치챈 정치부 수석기자 파리스의 입을 막기위해 자신의 딸 해라와 결혼을 언론에 발표한다. 해라는 아버지의 비열함, 파리스의 야비함으로부터 죽음으로 탈피하려고 결혼식 전날밤 독약을 들고 밤거리를 헤매다 아버지의 억압과 자신의 무력함으로 고통속에 거리를 헤매는 바라와 마주친다. 그들이 서로의 처지에 공감대를 느껴 독약을 나누어 마시고 죽어갈 무렵,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조리함과 완전치 못한 존재에 대한 상징적인 인물인 해태가 나타나 이들의 생명을 구한다. 서로에게서 희망과 사랑을 발견한 헤라와 바라는 결혼을 결심한다. 바라는 군대에 입대한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 몽하에게 해라와의 결혼결심을 알린다. 한편, 몽하가 사랑하는 미아의 행위예술 '신의 목욕탕은 금일 휴업'이 공연되고, 해태의 주례로 바라와 해라는 부모 몰래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 사실을 알게된 해라의 사촌오빠 볼트가 바라에게 폭력을 가하는 와중에 볼트는 바라의 총에 죽게된다. 어두운 밤 해라는 눈을 다친 바라를 데리고 도망치다가 이번에는 암살범인 해태가 나타나 해라를 기절시키고 눈을 다친 바라의 손에 총을 쥐어주고 사라진다. 암살범을 추적하던 계엄군 몽하는 어둠속에서 바라를 암살범으로 오인하고 사살한다. 시체가 바라임을 확인하자 몽하는 자신이 바라를 죽였다는 충격에 탈영한다. 에필로그는 해바라기 언덕행 버스 정류장에 해태가 서 있고 이윽고 청소부, 볼트, 고문당한 여자, 바라, 해라, 미아, 몽하가 차례로 해태 뒤에 한줄로 서서 버스를 기다린다. 해태는 이들에게 '보세요. 붉은 태양과 노오란 해바라기 그리고 춤추는 해바라기 물결, 얼굴, 다정하게 잡은 손, 느껴보세요 사랑의 물결을'라고 말한 뒤 모두가 손을 잡고 합창을 하면서 막이 내린다.
{바라해라}는 각 장면이 일정한 스토리에 의해 연결되지 않고, 인물들을 이해할 만한 단서나 사건도 거의 없으며, 행위예술, 형체없는 목소리뿐인 인물, 망상증환자, 대사의 반복 등 다양한 실험적 연극 장치로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나 이렇듯 이 작품이 불안정하고, 상징적이며 또한 꿈을 꾸듯 일정한 줄거리나 양식을 거부하는 것은 오늘날 로미오와 줄리엣의 순수한 사랑조차 장담할 수 없고 변질되고야 마는 불안정한 사회속에서 진정한 사랑과 순수에 대한 필요성을 자극하고자 하는 노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햄릿}(1998. 4. 14 - 20) / 정일성 연출 /
극단미학 창단 대 공연 / 국립극장 대극장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일성 감독은 자신이 창단한 극단 '미학'의 창단 공연으로 윌리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올린다. '첨단의 예술체험'과 '고급의 감성개념' 그리고 '무한의 실험정신'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선을 보인 이 공연에는 기라성 같은 연극계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시작부터 세간의 충분한 관심을 끌었다. 이번 작품의 연출을 맡은 정일성은 극단 대표이자 상임연출로 이번 공연을 통하여 자신이 오랜 세월 몸담았던 방송국 PD에서 본격적인 연극 연출가로 변신을 꾀하는 듯 야심찬 무대를 준비했다. 번역을 맡은 신정옥(명지대학교 영문과 명예교수)은 재치 넘치는 새로운 번역으로 최근 가장 널리 읽히는 셰익스피어 학자로 새로이 자리매김을 하고 있던 중, 자신의 번역이 무대에서 실험되는 좋은 기회를 만난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 '전격적'으로 주인공에 발탁된 김명수는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시대의 지성인의 상으로 그려진 주인공의 모습을 무리없이 소화하여 김동훈, 유인촌, 김경익, 등으로 이어져 내려온 우리무대의 햄릿사에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특히 조연급으로 출연한 장민호(유령역), 전무송(클로디어스역), 심양홍(폴로니어스역), 주진모(포틴브라스역) 등의 탄탄한 연기는 신인 배우의 과욕을 적절히 흡수하여 무대의 흡인력을 잃지 않고 스토리를 유연하게 펼쳐지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오필리어 역의 배유정은 현대판 강인한 여성상으로 대사처리와 연기가, 지성적인 모습과 우수에 찬 분위기로 번민하는 현대적 햄릿의 김명수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한 점도 없지 않으나 예의 노련한 무대 감각과 대사처리 등으로 기억에 남을 만한 독특한 오필리아 상을 창조했다.
음악과 음향을 맡은 김벌레와 무대미술의 김효선, 조명의 김인철 그리고 의상 디자인의 이광희 등도 모두 고급스런 무대를 만들어 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한 점은 이와같이 부분별로는 각기 나무랄데없이 훌륭한 연기진과 스텝진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공연의 감동은 기대한 만큼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수준높은 정통 고전극을 기대했던 많은 관객들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관객들의 실망은 리얼리즘 계통의 방송극에 젖은 연출가의 몸에 밴 연출감각이 국립극장 대극장의 무대 공간에서 적절하게 변모하지 못한 데서 오는 답답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데, 원작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비극적 상상력을 평면적으로 도해하여 담아내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수준 높은 공연이 이땅에 정착할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고 또 그만한 공이 들어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상기해 보면, 극단 미학이 창단 공연으로 준비한 {햄릿}은 그런 대로 의미있는 시도임에는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더 원숙한 모습으로 보다 많은 셰익스피어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연구와 실험을 거쳐 '고품격'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98 셰익스피어 상설무대 (1998. 4. 14 - 8. 23) /
공연기획 장이 / 북촌 창우극장
98년 한국 셰익스피어 공연사중 특기할 만한 것은 북촌 창우극장에 셰익스피어 상설무대가 섰다는 점이다. 공연기획 장이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이 상설무대는 {맥베드}(극단 작은신화, 4. 14-19), {햄릿}(극단 노뜰, 5. 19-24), {한 여름 밤의 꿈}(극단 사조, 비파, 6. 2-6. 14), {페리클리스}(극단 셰익스피안 86, 7. 21-26),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극단 여행자, 8. 14-23) 등 5편의 작품들이 연속적으로 한 장소에서 공연되어 구미의 '셰익스피어 페스티발' 형태를 예고해 주고 있다. 공연기획 장이의 대표인 김탄일은 98년 1월 뜻을 같이하는 젊은 기획자들의 중지를 모아 이번 셰익스피어 상설무대를 마련했다. 그 구성이며 운영방식 등은 김탄일이 일본 유학시절 보아온 매년 성황리에 개최되는 동경 셰익스피어 페스티발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앞으로도 기성극단과 아마추어 극단들이 함께 어울려 마음껏 연극 실험에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수준 높은 공연들을 기획할 계획이라고 그 포부와 야망을 밝혀 고전을 사랑하는 우리 관객들에게 또 하나의 희망을 안겨준다.
{맥베드}(1998. 4. 14 ∼ 19) / 김동현 연출 /
극단 작은신화 / 북촌 창우극장
기성 극단과 아마추어 극단이 골고루 섞인 이번 상설무대의 첫테잎을 끊은 것이 바로 극단 작은 신화의 {맥베드}였다. 소극장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무대와 객석을 모두 십분 활용했던 이 공연에서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관객들은 좁은 공간에 물결치는 '욕망의 소리'에 시달렸다. 이 극에선 '욕망의 소리'를 뒤쫓는 맥베드와 맥베드부인의 불안한 심리를 파헤치고 이 소리가 내면에 잠재하다 분열되고 떠돌다 사라지는 과정을 배우들의 역할놀이와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긴장과 섬뜩함, 그리고 인생의 허무함 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암흑. 라디오 잡음 같기도 한 귀에 거슬리는 소음들. 배우들은 욕망의 소리의 원천인 숲(객석)을 지나 축제의 공간인 무대로 나아가 살인하고 목적을 성취하나 죄책감에 갈등하다 머지않아 죽음에 다다른다.
'더이상 아무 소리도 남지 않았구나. 인생이란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 시끄럽고 소란스럽기만 한 광란의 소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맥베드의 마지막 대사처럼 인생은 허무한 것.
이 압축된 내용을 속도감있게 진행해 나가면서 암흑속에서 부분조명을 사용하거나 극도로 절제된 무대세팅의 일환으로 갑옷을 무대 한켠에 매달아 왕좌를 상징하는 등의 기법을 사용해 막이 내리는 순간까지 관객의 시선을 잡아두는데 성공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햄릿}1998. 5. 19 - 24) / 원동오 재구성, 연출 /
극단 노뜰 / 북촌 창우극장
상설무대의 두 번째 작품으로 선보인 극단 노뜰의 {햄릿}은 젊은 연극인들의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독특한 공연이었다. 원작의 플롯은 살린 채, 대사를 과감히 삭제하고 그대신 마임과 상징적 몸동작, 그리고 춤으로 표현한다.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낯설지 않은 원작의 줄거리를 전쟁과 살육과 부패가 난무한 어느 도시를 배경으로 세 개의 장으로 나누어 접근한다. '거투르드의 욕망'이라고 명명된 첫장에서는 불륜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거투르드와 클로디어스가 마침내 왕을 살해하고 선왕의 장례식중에 결혼식을 올린다. '무-햄릿의 자의식'으로 명명된 두 번째 장에서는 선왕의 살해 비밀을 알아낸 햄릿이 숙부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지만 그 복수가 선왕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영달을 위한 계산적인 복수의 일념으로 그려진다. 마지막으로 '권력'으로 명명된 셋째장은 선왕으로부터 숙부로 이어진 절대권력 앞에서 햄릿과 거투르드는 굴절된 비관적, 염세적 인간성을 드러내게 되고, 권력의 횡포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리는 자기 의지는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데, 이러한 혼돈속에 등장한 포틴브라스는 덴마크를 평정하고 권력은 제 3자의 또 다른 절대 권력자의 손에 넘어가 질서를 유지한다.
이러한 줄거리를 중심으로 무대는 시종일관 절제된 움직임과 마임, 그리고 빛을 통해 반사되는 파편적인 이미지들로 관객들에게 시적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과감하게 삭제된 대사와 부플롯, 그리고 마이너 캐릭터들도 주인공의 심리적 변화와 갈등에 맞추어진 연출의도를 감안하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오히려 단순하면서도 탄력성있게 처리한 새 구성으로 깔끔하게 재단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젊은 연출가와 배우들의 의욕이 너무 앞선 나머지 원작에 대한 세밀한 연구와 분석과정을 생략한 채, 시적 움직임과 주인공의 내면 심리의 표현에만 치중한 나머지 작품 전체의 균형을 잃어 무대가 지저분하게 채워진 점은 이 공연의 큰 단점으로 지적된다. 열의도 좋고, 실험정신을 내세운 의욕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원작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일 것이다.
{한여름밤의 꿈} (1998. 6. 2 ∼ 14) / 성준현 연출 /
극단 사조. 비파 / 북촌 창우극장
남녀간의 엇갈린 사랑으로 한바탕 시끌벅적 유쾌한 사랑놀이가 벌어지고 종국에 가선 모두들 이 소란을 즐거운 꿈이었으려니 하며 끝을 맺게 되는 극, 바로 {한여름밤의 꿈}이다. 이 공연은 북촌창우극장에서 계속된 ''98 셰익스피어 연극 상설무대'의 일환으로서, 남녀의 사랑과 관객의 상상력으로 그 빛을 발하는 이 작품에서 연출을 맡은 성준현은 추상적 사랑과 그것을 표현해 내는 육체적 행위를 통해 '사랑'이라는 글자뒤에 숨어있는 구체적인 의미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내고자 했다.
스산한 음악이 흐르고 아테네의 공작 티시어스는 히폴리터를 힘으로 차지하고 나흘 뒤 있을 결혼식을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허미어와 라이센더. 헬레나와 이미트리어스 간의 쫓고 쫓기는 사랑의 혈전이 벌어지고 요정의 왕 오베론의 계략으로 타이테이니어는 추한 모습을 한 보텀과 사랑에 빠진다.
원작의 줄거리를 지나친 가감없이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이번 공연에서는 원작이 가지는 시적인 아름다움을 제거하는 대신 현대화한 언어로 간결함과 속도감을 주려했다는 연출의 변대로 직설적이고도 우스꽝스러운 대사 그리고 풍선으로 과장된 오베론의 남근이나 지나치게 큰 타이테이니어의 가슴, 엉덩이 등이 희극이 주는 맛을 더해주고 있다.
이와 더불어 웃음 속에서도 퍽의 입을 통해 '진실한 하나의 맹세가 또 다른 맹세를 낳는 세상인데요, 뭐' 라며 가벼운 사랑이 만연된 현 세태를 꼬집은 흔적도 보인다.
이 공연에서 또 한가지 특기할 점은 배우들의 등, 퇴장이 거의 없다는 점인데 이는 배우와 세트의 오브제적 활동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한다. 따라서 등퇴장을 없앤 대신 극도로 절제된 무대세트에서 배우들은 자신들이 퇴장해야 할 때가 되면 까만 선글래스를 끼고 무대 양 옆으로 서서 하나의 무대 세트가 되곤 한다.
이제 오베론의 해독제 덕에 모두가 제 자리를 찾게 되고 결혼식 날 공연된 초라한 연극을 보며 불평하는 히폴리터에게 티시어스는 배우 자신들 만큼만 이쪽에에 상상력을 동원해주면 훌륭한 배우로 보일 수 있다며 그녀를 달랜다.
이렇게 그 날의 공연 또한 현실의 관객들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요구하는 그러한 무대였다.
{페리클리스} (1998. 7. 21 ∼ 26) / 한영식 연출 /
극단 셰익스피안 86 / 북촌 창우극장
셰익스피어가 극작 후기에 낭만극으로 관심을 돌리면서 쓴 중세 로망스풍의 {페리클리스}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북촌창우극장에서 열렸던 '98 셰익스피어 연극 상설 무대'에 다른 극단과 함께 참가했던 극단 셰익스피안 86은 86년에 만들어진 직장인 연극동호회로서 아마추어 극단이다. 이들은 창단 이래로 꾸준히 셰익스피어 작품을 무대에 올려왔는데 올해 선정된 작품이 바로 {페리클리스}다.
이번 공연을 있는 그대로의 서사시적인 구조와 정신을 소개하고 공연 가능성을 실험하는 기회로 삼겠다고 연출이 밝힌 바대로 극의 내용은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형식적인 면에서는 전체적으로 검은색의 단순화된 무대에서 배우들이 보두 가면을 쓰고 흑과 백으로 구분된 의상을 입음으로써 유형적 인물들을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시키면서 1인 다역을 무리없이 소화해 내고 있다.
반면에 가면을 쓰고 유형적 인물을 더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기 위해는 좀 더 큰 몸짓이나 변화있는 목소리의 톤을 사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아마추어 극단으로서 기성극단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쏟았던 땀방울에 갈채를 보낸다.
{로미오와 줄리엣} / (8. 14-23) (재공연 8.24-9.11) /
양정웅 연출 / 그룹 여행자 / 북촌 창우극장
'98 셰익스피어 상설무대의 마지막 순서로 북촌 창우무대에 올려진 {로미오와 줄리엣}은 현대 무용극에 조예가 깊은 젊은 연극인 양정웅이 연출을 맡아 작품을 우리 감각과 입맛에 맞게 재해석한 공연이다. 자신의 실험적 성향의 연출기법을 기반으로 양정웅은 정통 고전 비극의 현대적 해석으로 진일보하려는 야심에 찬 도전을 시도한다. '원작에 대한 재해석'이니, '해체'니 하는 말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양정웅은 과감하게 장면들의 구성을 뒤바꾸고, 생략하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장면들을 삽입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 원작의 유려하고 웅장한 대사들이 만들어 내는 시적 영상들은 젊은 연출가의 상상으로 변형된 스타일로 고전극과 현대극의 혼합된 영상으로 무대위에 제시된다.
아마추어급 연기자들이 호흡을 맞추어 이루어낸 이 공연은 열악한 제작환경과 무대 조건을 감안한다면 그런대로 열심히 공을 들여 준비했다는 점은 평가해 볼 만 하지만, 군데군데 세부적인 장면처리에서 프랑코 제피렐리가 감독한 영화(레오나르드 파이팅, 올리비아 핫세 주연)의 그것을 그대로 닮은 듯한 장면들이 상당수 눈에 띄어 연출가의 역량의 한계를 드러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공부중인 젊은 연극인들의 무대이니 만큼, 어려운 고전에 도전하여 많은 것을 배우려고 나름대로 시도했다는 점과 셰익스피어의 고전 비극을 통해 관객들과의 친숙한 접근을 지향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또 하나의 아류작이기를 거부하고 독창적인 실험정신을 가지고 원작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진지한 무대를 준비했다는 점등은 평가할 만하다.
{로미오와 줄리엣}(1998. 4. 16 ∼ 5. 31) / 오유경, 강은경, 이희준 개작 / 박중현 연출 / 극단 PAPA / 바탕골 소극장
사랑! 시공을 초월해서도 우리가 떨쳐버릴 수 없는 이 단어.
셰익스피어가 들려 준 두 남녀의 애절하고 가슴 시린 사랑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을 극단 PAPA가 원작 속의 반목, 애정, 갈등, 회한과 같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오직 사랑에만 초점을 맞춰 무대에 올렸다. 따라서 단순화된 줄거리에 등장인물은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나래이터 역할을 하는 시인뿐. 그러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각 하나이면서 둘, 즉 한 인간이 가진 양면인 이성과 감성으로 나타난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로미오 블루와 줄리엣 레드, 감성적이고 순수한 사랑을 붸는 로미오 블랙과 줄리엣 화이트로 두 사람의 갈등하는 내면이 형상화된 것이다.
첫눈에 반해버린 두 사람. 그러나 두 집안이 견원지간인데다 줄리엣의 사촌을 로미오가 죽이게 되자 로미오에 대한 사랑(화이트)과 증오(레드)로 갈등하는 줄리엣. 지아비에 대한 순수한 사랑에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던 줄리엣은 페리스 백작과의 결혼을 피하기 위해 죽은 시늉을 하고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로미오 블랙은 절규하며 권총으로 자살하고 말지만 현실적인 로미오 블루는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난다.
잠에서 깨어난 줄리엣은 로미오의 주검 앞에서 울부짖는다. 줄리엣 레드는 그 처참한 광경을 피해 달아나지만, '사랑이 이 모든 두려움을 이기게 해줄 거야'라고 마음을 다잡아 왔던 순수한 영혼 줄리엣 화이트는 로미오와 영원히 함께 하기를 결심하여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이때 나타난 시인의 '이 세상 모두 내것이라면 사랑, 너에게 바치리라'하는 대사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랑의 형태도 다양해졌다지만, 그래도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의 중요성을 재인식시키기에 충분하다.
원작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사족을 없애고 오직 '사랑'에만 초점을 맞추려 한 제작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위해 배우들의 대사와 움직임뿐만 아니라 공연을 위해 동원된 모든 것(무대 세팅, 의상 등)들이 보조적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우선 시인의 나래이션은 원작에서의 아름다운 선율을 느끼면서도 무대에 보여지지 않는 내용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지루하지 않고 속도감있게 한가지 주제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또 사방으로 펼쳐진 흑백의 격자무늬 배경은 현실(이성)과 이상(감성)속에 갈등하는 우리 인간의 내면상황을 대변해 주는 듯 하다.
{한여름밤의 꿈} (1998. 7. 29-31) / 주요철 번안·연출 / 경기도립극단 / 성남청소년 수련원 / 수원 화성 화홍문 특설무대 (재공연, 8.8, 8.22, 8.31) / 과천 세계 마당극 대축제 (재공연, 9/12-13)
경기도립극단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마당극으로 번안하여 7월에는 성남청소년 수련원에서 공연했고, 8월에 있었던 '98 수원 화성 국제연극·무용제와 9월에 열린 과천 세계 마당극 축제에 참가하여 서양의 작품을 한국화하여 민중적 연희전통을 계승한 한국의 마당극을 유감없이 선보였다.
경기도립극단의 마당극 {한여름밤의 꿈}은 원작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 시대 배경을 현재 IMF상황을 맞고 있는 우리나라의 자동차 생산공장으로 옮겨와 우리 관객들과의 공감대를 유발했다. 원작이 갖고 있는 밝고 코믹한 분위기와 음악성을 살려 뮤지컬 형식으로 재구성하고, 마당극의 특성에 맞춰 장면전환을 커다란 휘장과 소품들로 대신했다.
IMF상황하에서 자동차 생산공장에 일감을 잃은 생산직 근로자들이 모여 서로 신세타령을 하는 중에 연극에 미쳐 정리해고된 셰익스피어(보텀)가 나타나 근로자들과 함께 서로 단합하고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연극 {한여름밤의 꿈}을 공연한다. 연극은 대통령(티셔스)과 김희수(힙플리터)의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숲속의 요정 꾀돌이(퍽)가 등장하면서 원작과 마찬가지로 주된 줄거리인 대중가수 라이선(라이샌드)과 전경련 회장의 딸 허미아(허미어), 허미아와 결혼해서 정계에 진출하려는 도민수(드미트리어스)와 하예나(핼래너)의 뒤얽힌 사랑이야기속에 세가지의 겉줄거리인 대통령과 김희수의 연애와 결혼, 극중극 속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애절한 사랑(피러머스와 디즈비의 사랑), 산왕(오베론)과 상신(티타니어)의 싸움이야기가 춤과 노래가 어울어지고 더불어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조화 속에 펼쳐진다. 이 공연의 소득이라면 무엇보다도 서양의 원작을 우리의 전통 마당극으로 짜임새있게 무리없이 소화해 낼 수 있었다는 것과 우리 연극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는 것이라하겠다.
{제 12야}(9. 11 - 20) / 박원경 연출 / 신정옥 번역 /
남육현 드라마투르기 / 국립중앙극장소극장
국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에 새로 취임한 정상철은 1986년부터 계속되어 온 '세계명작 무대' 시리즈의 일환으로 셰익스피어의 낭만희극, {제 12야}를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 올렸다. 매년 수준 높은 고전 작품을 선정하여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 기획은 이제 국립극단의 대표적인 활동중의 하나로 자리 매김 한 지 이미 오래이다. 즉흥적이며 순간적인, 얕은 재미가 아니라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진한 감동의 여운을 관객들과 함께 하고자 마련된 이 무대는, 신정옥 명지대학교 명예교수의 새 번역을 사용하여 젊은 관객 층의 언어 감각에 맞추도록 노력했고, 또 전문학자인 남육현 씨의 드라마트루기로 원작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연출에 임했으며, 이 외에도 이태섭 교수의 아카데믹한 무대미술로 소극장의 장점을 십분 활용함으로써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 매우 수준 높은 역작으로 평가된다.
비올라 역에 한희정, 올리비아 역에 곽명하, 오시노 공작 역에 최원석, 그리고 세비스찬 역에 이 상직 등 국립극단의 주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여 열연한 이 공연은 박 원경의 고전에 대한 정통파 연출과 해석으로 경망스럽지 않으면서도 매우 격조있는 무대로 기억되기에 충분하다. 특히 말볼리오 역을 맡은 전국환과 마이라 역의 조 은경 콤비가 만들어 내는 원숙한 희극 연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고전의 향기를 향유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기름졌다.
황현희의 화려한 의상 디자인과 이동훈의 교과서적인 조명 등은 국립 발레단 지도위원인 김긍수의 유연한 안무와 이철웅의 감미로운 음악 등과 어우러져 한결 고급스런 고전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원작에 배여 있는 연극 미학과 희극적 재미 등이 손상됨 없이 그대로 장점으로 살려낸 수작이다.
{매직타임} (1998. 9. 17. ∼ 11. 1 / 11. 3 ∼ 1999. 1. 3) / 제임스 셔만 원작 / 장진 번안·연출 / 극단 PAPA / 바탕골 소극장
최근 연극과 영화를 오가며 극작, 연출 등 바삐 움직이던 장진이 또 한 번 일을 벌렸다. 이번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요리하는 일이다. 다소 어둡고 무거운 느낌의 원작을 제임스 셔만이 쓴 무대 뒷얘기에서 그 모티브를 따와 거의 새로운 느낌의 [햄릿]을 창출해 낸 것이다.
이 극의 제목은 {매직타임}. 일명 {Show Time} 이라고도 하는 무대 위의 가상의 공간이나 시간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극의 배경도 {햄릿} 공연의 마지막 날, 극단의 분장실이다.
무대감독은 공연 마지막 날까지도 지각하는 배우들에게 열받아 있고, 무대에 선다는 희열 하나로 버텨온 중견배우 규수는 먹고 살기 위해 '경찰청 사람들'에 대역 배우로까지 뛰고 있다. 연극배우의 자존심으로 연극무대만을 고집해 오던 지현은 대학시절 자신보다 연기력이 떨어지던 하균이 TV 스타라는 이유로 {햄릿}의 주인공으로 발탁된 것이 못마땅해 계속해서 하균과 충돌한다. 오필리오역의 경수는 실제 연인인 하균의 무심함을 불평하고, 공연 중에 자꾸 사투리를 써 대는 문식은 무대감독의 골치덩어리다.
이들은 막이 오르기 전 분장실에서 객석을 거울 삼아 분장을 한다. 그 와중에 에술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연극판을 지키기가 너무도 어려운 현실에 대한 탄식이 터져나오고 자신들의 공연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현학적 어구로 가득 메워놓은 비평의 난해함을 꼬집기도 한다. 대화 도중 햄릿이 꼭 정극으로만 공연되어져야 하느냐는 문식의 제안으로 즉석에서 마당극 [햄릿]이 펼쳐진다.
딱딱한 정극용 대사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바뀌고 윗트있는 대사가 관객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들면서도 그 속에서 흰줄로 경상도 말씨를 쓰는 네편(숙부 클로디어스)과 전라도 말씨의 내편(햄릿, 왕비, 폴로니어스, 레어티스, 오필리어 등)으로 갈라놓음으로써 이분법적 사고에 젖어있는 우리의 의식과 세태를 풍자하는 진지함을 보여 주기도 한다. 또 햄릿을 '자신의 욕망 때문에 사랑을 버린 남자로, 오필리어가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햄릿의 사랑을 얻지 못해 미쳤다고 보고, 햄릿에 의해 죽은 오필리어의 아버지와 오빠까지도 외형적으로는 그와 적대관계였으나 내심 햄릿의 상황을 충분히 동정하여 내편이 되어 주는 등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있는 원작의 난해함을 고전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을 위해 간결히 정리해 주는 친절함까지 베푼다.
숨쉴 틈 없이 분장실 장면과 극중극 장면이 교차하면서 원작에서 햄릿과 레어티스가 결투 후 갈등을 종식시키듯 햄릿역의 하균이 레어티스역의 지현의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하면서 둘 사이의 갈등 또한 사그라진다.
이제 화해와 현실의 장으로 돌아오면서 '언제나 그랬듯이 가장 멋진 무대를 만듭시다. 그게 우리가 세상에 서 있는 방법이잖아요.'라며 새로운 의욕을 불태운다.
연출에 의해 '아픈 현실에 대한 작은 수다'라고 표현된 이 극은 열악한 연극 환경에 대한 배우들의 한탄으로만 그치지 않고 극중극 햄릿을 통해 가벼움과 진지함, 다시 말해 즐거움과 잔잔한 감동을 일궈낸 훌륭한 무대였다 하겠다.
{오델로― 피는 나지만 죽지 않는다}(1998. 9. 18 ∼ 11. 1) / 박근형 각색·연출 / 극단 동숭무대 / 대학로 극장
(재공연 1998. 11. 25 ∼ 12. 6 / 예술극장 활인)
20년간을 오직 한길, 연극만을 매달렸던 남자, 청순하고 사랑스럽고 어린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한 남자. 고지식하고 아내를 너무도 사랑해 질투에 눈이 먼 나머지 연극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아내를 죽이고 만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정신병원에, 훨체어를 탄 채.
연극배우였던 그의 배역은 오델로. 그는 이렇게 읊조린다. '나는 사랑을 죽였다. 어리석게도 나는 사랑을 보려했고 들으려 했다. 나는 사랑 앞에서 부끄럽다. 눈을 뜰 수가 없다. 나는 혼자다. 외롭다. 외로워도 싸다'
무대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오델로}공연을 위한 배역이 결정되면서 갈등은 시작된다. 나이 많은 주인공이 여러 명으로부터 사랑받던 어린 여배우의 사랑과 오델로의 배역을 동시에 얻게되자 주변의 시샘을 받게된다. 케시오 역을 맡은 배우는 자신이 이아고 역을 맡지 못한 것과 흠모하던 여인을 빼앗긴 것을 설욕하기 위해 데스메모나 역을 짝사랑하는 로더리고 역을 이용해 계략을 꾸민다.
오델로 역과 데스데모나 역의 관계를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 그녀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오델로 역을 나쁜 인간으로 오해하게끔 만들고, 오델로 역에게 그의 아내가 이아고 역과 불륜관계에 있더라고 넌즈시 암시하면서 그로 하여금 우연히 아내의 수첩과 그 안에서 사진을 발견하게 해 질투의 화신으로 만드는 캐시오 역의 행동과 말들이{오델로}에 등장하는 이아고의 그것과 닮아있다.
이렇게 아내에 대한 의심을 키워가던 오델로 역은 {오델로}에서 오델로가 데스데모나를 죽이는 장면을 연습하다 실재로 그녀를 죽이고 만다.
오델로 역이 정신병원에서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후회하며 '연극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했다구요. 연극과 현실!'이라고 절규하는 것처럼, 이 연극은 시종일관 {오델로}공연을 준비하는 현실과 실재 {오델로}장면이 오버랩되면서 관객마저도 현실과 연극속에서 혼돈스러워하는 오델로 역의 의식세계에 동참시키고 있다.
'열심히 살지 마세요, 그러면 곧 열심히 후회하게 될거요' 마치 다가올 비극을 예견하는 듯한 데스데모나 역 아버지의 이 말은 연극과 사랑에 몰입해 혼돈의 늪에 완전히 빠져버려 헤어날 수 없게 된 그의 처지로 현실화된다.
막은 내렸지만, 실재 올려진 공연에서 '순진한 마음이 토막난 상징'으로 쓰여질 휠체어만이 무대에 남아 토막나버린 오델로 역의 마음과 의식세계를 전해주는 듯 하다. 그런 오델로의 감정기복을 표현하는 데 있어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지만.
{인간 리어}(1998. 10. 16 ∼ 25) / 기시다 리오 원작 /
김아라 구성·연출 / 축제극단 무천 / 무천캠프
죽전 호수가에 야외극장을 세우고 남다른 열정과 실험으로 우리 연극의 한 줄기를 이어가고 있는 연출가 김아라가 이번에는 셰익스피어 원작의 {리어 왕}을 완숙한 무대 어법으로 재해석하여 자신의 실험실인 호변무대에 올렸다. 죽산 무천 연극 캠프의 두 번째 작업으로 기록된 이 공연은 첫 번째 작업이었던 다국적 실험극 {오이디푸스 프로젝트 1} 때와 마찬가지로 연극인 중심의 '축제형 음악극'이라는 독특한 실험극의 세계를 유감없이 구현했다. {인간 리어}는 연출가 김아라의 연극에 대한 복합 종합예술(Art Complex)의 비전에 담겨있는 형식미학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우리의 연극사에 길이 남게될 이 공연은 복제 문화의 범람 속에서 무디어져 가는 고전 감각의 재고와 장르 해체를 뛰어넘는 원시적인 퍼포먼스의 장점들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과 전율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그중에서도 리어역의 남명렬이 내뿜는 열기는 야외극장의 넓은 공간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에너지로 가득했고, 반라의 몸으로 등장하여 유려한 춤동작으로 무대를 장식해준 리어의 부하역의 최경원과 시종역의 박종현 등이 보여주는 우아한 격투동작들은 그대로 하나의 아름다운 율동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광야를 헤매는 리어가 진짜 숲속에서 밀림을 헤치고 등장하는 장면이라든가, 리어의 내면세계의 갈등을 스폿트라이트와 마이크를 이용한 나레이팅 기법으로 처리한 점, 그리고 연극적인 움직임과 소리의 세계가 현란한 조명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무대를 만들어 보는 이로 하여금 리어라는 한 비극의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설화적 그림으로 풀어낸 점 등은 이 공연의 백미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는 장점들이다.
원래 이 공연은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텍스트로 하여 일본의 중견 연출가 기시다 이로가 재창작한 것을 김아라가 자신의 무대관에 맞추어 재구성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즉, 셰익스피어의 시적 은유의 세계가 일본인 연출가 기시라 리오에 의해 설화적 세계로 둔갑한 것을 김아라가 훨씬 육감적인 신체와 소리의 세계로 발전시킴으로써 주인공 개인의 비극이 보편적 인간의 영원한 비극으로 환생하여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작에서 왕국을 3등분하여 주고 정계에서 은퇴하고 여생을 편히 지내겠다고 하며 딸들의 효심어린 말을 기대하던 리어에게 '아무 할말이 없습니다.(Nothing, my lord)'라고 일관하여 노여움을 사는 장면을 김아라는 '아---'소리의 톤에 희망과 절망을 담아 일관된 유성의 침묵으로 표현하여 원시적인 무대에 액센트를 더한다. 한치의 군더더기도 허용치않고 가파르게 몰아가는 야외무대에 관객들은 숨을 죽인 채 한눈 한번 팔 새 없이 작품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덧 막이 내릴 시간이 되고 그제서야 가뿐 숨을 몰아쉬며 가슴에 남은 감동을 정리하다 보면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흐르게 되는, 근자에 보기드문 역작으로 우리 셰익스피어 공연사에 길이 남기에 부족함이 없는 공연이다.